1991년 어느 가을밤.
요즈음 언론에서 자주 나오는 파이시티, 이 곳은 내가 대학을 졸업후 첫직장(진로그룹 한국트럭터미널) 이였다.
인사과로 입사를 해서 1년 반만에 그룹내 유통부문을 주류부문과 함께 주력으로 키운다고 3개회사를 합병하였다.
3개회사가 합병된 조직의 인사교육팀 업무는 말 그대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일상업무이다.
그런 중에 초산초교 재경동문회 임원모임을 을지로 안동장에서 한다고 12회 지인영 선배님의 전화.
28회(추산초) 동창 주소록을 사전에 팩스로 보내라 한다.
회사일이 바쁘니 동창주소록을 챙길 여유는 당연히 없고 더구나 동문회라는 단어도 생소한때다.
30여명의 동창들 주소록을 작성해서 저녁에 안동장 2층에 도착을 하니 내가 막내였다.
입구에서 악수를 청하며 좋아 하시는 분이 " 난 13회 김영식이요 " 참석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영식형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동문모임까지 이여진다.
종종 명보극장 뒷편 영지문화사를 하실때 찾아뵈면 그 바쁘신데도 다방커피를 시켜 주시며 저녁에 쐬주 한 잔 하잔다.
세종문화회관 뒷편 은행나무부페의 재경목도중학교 동문회 송년의 밤, 불정면민회 모임, 프레지던트호텔 재경괴산군민회 모임,
명보사진관에서의 "목향"지 기념사진 찍던 날 그리고 내 집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낼 때
빈소에서 밤을 새우면서 병철이 네가 잘 되어야 하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위로를 해 주시던 모습.
6대 총동문회 회장을 5년 하시면서 후배들과의 부분마찰 등등.........
영식형님은 목도로 낙향하셔서 마지막으로 동문회를 위하여 작품하나 만들고 싶어 하셨다.
그 후(서초동 태능갈비 임원모임에서 후배들과의 이견)에 전화를 드려 웃으면서 " 형님 한기수에서 오랫동안 총동문회장을 하시면
저희땐 나이가 80세는 될것 같아요, 그 골치아픈 총동회장 이제 후배들께 넘겨주세요.
영식형님과의 대화 중에 자주 하시는 말씀 " 바쁜시간 쪼개어 동문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 상당히 보람이 있고
희열도 느낀단다.
내가 지금까지 동문회에 참여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꽃인 금전을 떠나 몸으로 열심히 뛴 분이 바로 김영식 선배님이다.
이제 우리 카페의 "그리운 고향 괴산" 란을 어느 분이 채워주실까.....
지난 토요일, 두 분의 대선배님 부고를 받고 대전보훈병원을 조문하고 홍순기 고문님과 괴산으로 갔다.
나도 상가집을 많이도 다녔지만 이렇게 빈소주변이 쓸쓸한 경우는 드물었다.
총동문회, 동문산악회 등등 내 자신이 동문애를 느껴 보시라고 카페에 종종 표현을 하지만 상당히 추상적인 단어이다.
과연 동문애란 단어의 실체는 어디까지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이번에 괴산을 다녀 오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영식형님의 영전에서, 시신 수습부터 장례기간 끝까지 제2대 총동문회 회장을 역임하신 윤관노 고문님과
중학교는 다르지만 목도에 사시는 김영수 어르신(괴산 향토문화사 회원) 두 분의 행동에서 동문애를 직접 목격하였다.
첫째날 윤관노 고문님의 말씀이 유가족이 화장을 원한다고 해서 화장을 하기로 하였다는.
둘째날은 김봉구 회장님과 김현기 사무총장님과 갔을 때, 유가족과 얘기가 잘 되어 청천면 덕평리 외가 선산에 모시기로 하였단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지관(목도 김영수 어르신)을 모시고 윤관노 고문님은 덕평으로 가시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은 귀경을 하였다.
마지막 날 새벽에 일어나 영식형님과의 인연을 떠올리니 괴산을 갈 수 밖에 없다.
아진아! 김영식 아저씨 오늘 발인이야 지금 괴산으로 가서 산소 만드는 것이나 보고올께.
6시 50분에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차량이 많아서 달릴 수가 없다.
음성에서 소수를 지날때 민훈형(21회)께 전화를 하니 벌써 삼성병원에서 발인을 하였단다.
덕평 선산을 물어물어 찾아가니 한창 굴삭기가 묘지터를 작업중이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윤관노 고문님과 김영수 어르신께 유가족도 아닌데 이렇게 보살펴 주신다고 여러번 물으니
하시는 말씀이 " 후배놈 갑작스레 죽었는데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지! "
내 생각에 동문애가 인생의 마지막 까지도 갈 수가 있는 단어이구나 라는 것을 몸소 보았다.
하관식후 봉분이 올라갈 때 영식형님 큰아들에게(영지문화사 시절부터 안면이 있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시는 저 두분께 평생 고마움 잊지 말아라 는 말과 함께 생전에 동문회 일에 열정적으로 하셨기에
저런 선배님도 곁에 있다네.
그리고 아버님을 위하여 화장이 아닌 매장으로, 그것도 당신 아버님(영식형님 선친) 바로 곁에 모신것을 잘했다.
돌아오는 길에 중원대학교 김근수 선배님 연구실에 들려 윤관노 고문님, 김영수 어르신과 함께 차 대접을 받았다.
김영수 어르신 말씀, 영식이 저 놈이 종종 전화를 해서 막걸리를 함께 마셨는데 이제 떠났으니 허전해서 어젯밤엔
잠을 설쳤다네.....
처음부터 끝까지 후배를 아껴주신 윤관노 고문님, 김영수 어르신께 존경을 표하고
바쁜데도 장지까지 달려오신 13회 김홍숙 선배님과 21회 이민훈 형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 김영식 고문님은 이 세상에 없지만 머나먼 하늘에서 목도중.고등학교 총동문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 주시리라
믿는다.
다시한번 고 김영식 선배님의 명복을 간절히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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